<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현상과 민주주의 ⑥ > 민주주의의 적은 독재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가장 조용한 방식 - 민주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제도가 아니다. 총성이 울리거나 군홧발이 등장해서 끝나는 경우는 드물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대부분 아주 조용하게,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진행된다. 그 이름은 독재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독재는 적어도 경계의 대상이다. 위협이 분명하고, 저항의 이유도 명확하다. 그러나 무관심은 다르다. 그것은 위험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곤해서”, “먹고 살기 바빠서”, “내가 관여해도 달라질 게 없어서”라는 말 속에 숨어 사회 전반에 퍼진다. 이렇게 무관심은 민주주의의 내부에서, 저항 없이 제도를 잠식한다. 민주주의는 참여를 연료로 삼는다. 투표, 토론, 감시, 질문, 비판 같은 일상적 행위들이 멈추는 순간, 제도는 껍데기만 남는다. 선거는 치러지지만 선택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의회는 존재하지만 시민의 삶과 멀어진다. 형식은 남아 있지만 내용은 비어간다. 무관심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책임의 공백을 만들기 때문이다. 시민이 관심을 거두면, 권력은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현상과 민주주의 ⑤> 질문을 멈춘 사회는 퇴보한다 - 교육·언론·제도의 경직화가 만드는 침묵의 구조 - 사회가 건강할 때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은 의외로 조용한 질문들이다. “왜 그런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이 결정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질문은 사회의 속도를 늦추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방향을 바로잡는 브레이크다. 이 브레이크가 사라질 때 사회는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위험해진다. 질문이 사라진 사회의 공기는 단순해진다. 복잡한 설명은 줄고, 단정적인 구호가 늘어난다. 비판적 사고는 불편함으로 취급되고, 질문은 분위기를 흐리는 행위로 여겨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묻지 않는 법을 배운다. 질문을 던지기보다 눈치를 보고, 이해하려 하기보다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는 신호가 사회 전반에 퍼진다. 이 현상은 교육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교육이 질문을 키우는 과정이 아니라 정답을 빠르게 찾는 훈련으로 바뀔 때, 학생들은 사고의 근육을 잃는다. 왜 그런지 묻기보다, 무엇이 나오는지를 외운다. 질문은 시험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현상과 민주주의 ④> 침묵하는 다수는 중립이 아니다 - 방관의 정치적 책임, ‘아무 말도 하지 않음’의 선택성 -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나는 어느 편도 아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괜히 나섰다가 손해 보고 싶지 않다.” 이 말들은 얼핏 중립처럼 들린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침묵은 결코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언제나 이미 힘을 쥔 쪽을 돕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선택은,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의사 표시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참여를 전제로 작동한다. 참여란 반드시 거리로 나서는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질문하고, 판단하고, 의견을 드러내는 최소한의 행위가 민주주의의 산소다. 이 산소가 부족해질 때, 사회는 겉으로는 조용해지지만 내부에서는 서서히 숨이 막힌다. 침묵하는 다수가 생겨나는 이유는 이해할 만하다. 첫째, 비용의 문제다. 목소리를 내면 피곤해지고, 공격받을 수 있고, 관계가 불편해질 수 있다. 둘째, 무력감이다. “내가 말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은 많은 시민을 관객으로 만든다. 셋째, 책임 회피의 심리다. 침묵하면 판단의 부담을 지지 않아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현상과 민주주의 ③> 비판하는 시민이 민주주의를 구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판’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비판은 불만, 반대, 발목 잡기라는 말로 치환되고, 때로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행위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비판은 결코 파괴가 아니었다. 오히려 권력이 길을 잃지 않도록 붙드는 안전장치였고, 시민이 시민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책임이었다. 권력은 본성상 집중되려는 성향을 지닌다. 선의로 출발한 권력이라도 견제가 사라지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제도적 견제만이 아니다. 법과 규정은 최소한의 울타리일 뿐, 그 울타리가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힘은 시민의 감시와 질문이다. 비판 없는 권력은 자신을 시험받지 않기에 쉽게 오만해진다. 그럼에도 많은 시민이 비판을 주저한다. “지금은 비판할 때가 아니다”, “괜히 문제를 키우지 말자”, “전문가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말이 익숙하다. 이런 태도는 겉으로는 안정과 협력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판단을 유예하는 선택이다. 판단을 미루는 동안 결정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시민은 점점 관객의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현상과 민주주의 ②> 왜 우리는 맹목적 추종에 빠지는가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라고 말하지만, 집단 속에 들어가면 생각보다 쉽게 방향 감각을 잃는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부터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저 사람이 앞서 가니까”라는 이유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결과가 바로 맹목적 추종이다. 맹목적 추종은 무지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하고 선의의 사람들, 책임감 있는 시민들조차 이 함정에 빠진다. 문제는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집단이 작동하는 방식에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속을 원한다. 집단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안과 고립을 감수해야 하기에, 다수가 향하는 방향을 의심하기보다 따르는 편이 심리적으로 훨씬 편하다. 여기에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추종은 강화된다. 경제가 흔들리고, 사회가 불안하며, 미래가 보이지 않을수록 사람들은 강한 확신을 말하는 인물에게 끌린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언어로 설명해 주는 사람, “내 말만 따르면 된다”고 말하는 지도자는 위기의 시대에 매력적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확신이 검증된 해법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일 때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 현상과 민주주의 ①> 국민들이 ‘앤트밀 현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자연에는 인간 사회를 비추는 거울 같은 장면들이 종종 있다. 그중 하나가 ‘앤트밀(Antmill),' 이른바 죽음의 소용돌이다. 시력이 거의 없는 군대개미들이 앞선 개미가 남긴 페로몬을 따라가다 방향 오류가 발생하면, 수백·수천 마리가 원을 그리며 끝없이 도는 현상이 벌어진다. 개미들은 자신들이 제자리에서 죽음을 향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탈진해 쓰러진다. 흥미로운 점은, 모든 개미가 죽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몇몇 개미는 이 이상한 순환에서 벗어나고, 방향을 바꾸며, 다른 개미들에게 탈출의 계기를 제공한다. 차이는 단 하나, ‘따라갈 것인가, 판단할 것인가’에 있다. 이 장면은 인간 사회에도 낯설지 않다. 길을 잘못 든 지도자 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집단은 집단적 오류에 빠진다. 더 큰 문제는, 그 오류가 단번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앞서 가는 사람이 있으니 맞겠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라는 심리가 작동하면서 집단은 더욱 단단히 원을 그린다. 마치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이상수 기자 | <사법신뢰회복 ⑨> 사법 신뢰 회복은 민주주의의 자기 수리 능력이다 - 제도 이후의 과제, 사회의 책임 -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강점은 스스로의 결함을 인식하고 고쳐 나갈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사법 신뢰의 흔들림을 둘러싼 오늘의 논의 역시 실패의 징후라기보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을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 신호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향으로 응답하느냐에 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사법 신뢰 회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과 그 실행 단계를 살펴보았다. 인사권의 분산은 재판의 독립을 제도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출발점이었고, 판결의 설명 책임은 사법이 시민과 소통하는 최소한의 언어였다. 양심적 판사를 보호하는 제도는 사법의 품격을 유지하는 마지막 안전망이었다. 이어서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과 사법개혁이 정치화되며 좌초되어 온 이유, 그리고 입법부가 지켜야 할 헌법적 균형까지 짚어보았다. 이 모든 논의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진다. 제도가 마련된 이후,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법 신뢰 회복은 법률 몇 조를 고친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제도는 출발점일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사법신뢰회복 시리즈 ⑧> 판사의 ‘양심’, 국민은 어디까지 기대해야 하는가 — 양심이 믿음의 대상이 아닌, 검증의 대상이어야 할 이유 - 일상에서 우리는 종종 “양심에 기대어 말해 달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대체로 거짓 없이 사실을 말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최소한의 진실성을 지켜 달라는 사회적 약속이 그 말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사법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양심’이라는 단어는, 그 일상적 의미와는 다른 오해를 낳아 왔다. 판사들은 판결문에서 흔히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사법 독립의 상징처럼 반복되어 왔지만, 동시에 시민에게는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과연 국민은 ‘판사의 양심’을 어디까지 기대해야 하는가. 판사의 마음속 선의까지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보다 다른 기준이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민은 판사의 ‘내면적 도덕성’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위험한 기대다. 개인의 선함에 의존하는 사법은 운에 맡기는 사법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재판을 맡으면 정의가 실현되고, 그렇지 않으면 왜곡될 수 있는 구조라면, 그 사회의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사법신뢰회복 ⑦> 입법부는 사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 견제와 존중 사이의 헌법적 균형 - 사법개혁 논의가 입법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가장 첨예한 질문이 등장한다. 국회는 사법에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으며,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분명히 하지 못했기에 사법개혁은 번번이 정치적 충돌로 소모되었고, 제도 개선은 진전되지 못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결단이 아니라 헌법적 균형에 대한 성찰이다. 입법부와 사법부의 관계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다. 헌법이 설계한 권력 분립은 상호 견제를 통해 권력의 자의를 막는 구조다. 이때 입법부의 역할은 사법을 통제하는 데 있지 않고, 사법이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데 있다. 이 원칙이 흔들릴 때, 사법개혁은 곧바로 정치 개입 논란에 휩싸인다. 입법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입법부는 사법의 구조와 절차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하고 입법할 수 있다. 판사 인사 구조의 분산, 인사 과정의 투명성, 판결 이유 기재의 기준과 범위, 양심적 판사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 등은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연대인가 헌납인가, 합당을 둘러싼 몇 가지 질문 최근 정치권에서는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합당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정당의 통합과 재편은 정치사에서 낯선 일이 아니다. 시대 변화와 정치 환경의 요구에 따라 정당이 연대와 통합을 모색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다만 지금 제기되는 논쟁은 합당의 당위성보다는, 그 방식과 시점, 그리고 그 정치적 함의에 대한 신중한 질문에서 비롯되고 있다. 첫째로 짚어볼 사안은 절차의 문제다. 민주당은 그동안 당원 참여와 숙의를 강조하며 ‘당원 민주주의’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워 왔다. 그렇다면 합당과 같은 중대한 결정은 당원과 지지층을 대상으로 충분한 설명과 토론, 의견 수렴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최근의 논의는 다소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합당이 개혁의 확장인지, 아니면 권력 구조 조정의 신호인지를 놓고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채 추진된다면, 그 과정 자체가 또 다른 불신을 낳을 수 있다. 둘째는 비례성과 대표성의 문제다. 조국혁신당은 창당 이후 분명한 문제 제기와 상징성을 보여 왔으나, 전국 단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개인의 이름으로 정당을 부를 수 있는가 — 민주주의는 왜 ‘사람’보다 ‘가치’를 선택해 왔는가 — 정당은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다. 시민의 다양한 이해와 가치를 조직해 공적 의사결정으로 연결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당의 이름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세계 정치사를 돌아보면, 정당 명칭에 특정 개인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는 사례는 놀랄 만큼 드물다. 이는 단순한 관행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스스로 설정해 온 경계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정당의 이름은 원칙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가치’를 담는다. 자유, 보수, 노동, 녹색, 공화, 민주와 같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이념과 방향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정당은 개인을 넘어선 집단적 선택의 공간임을 선언한다. 반대로 개인의 이름을 정당명으로 삼는 순간, 정당은 제도에서 브랜드로, 공공조직에서 사적 조직으로 오인될 위험을 안게 된다. 물론 현실 정치에는 개인 중심 정당이 존재해 왔다. 이탈리아의 '포르자 이탈리아' 는 공식 명칭에 개인 이름을 쓰지 않았지만, 창당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의 정치적 브랜드와 사실상 동일시되었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사법신뢰회복 ⑥> 사법개혁은 왜 번번이 좌초되는가 - 정치화의 덫과 제도 논의의 실종 - 사법개혁은 한국 사회에서 낯선 의제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굵직한 판결이 나올 때마다, 사법개혁은 늘 화두의 중심에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체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질문은 단순하다. 왜 사법개혁은 늘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번번이 제자리로 돌아오는가. 첫 번째 이유는 사법개혁의 정치화다. 사법개혁은 대체로 특정 사건이나 특정 인물을 계기로 촉발된다. 문제는 그 순간부터 개혁의 언어가 제도의 언어가 아니라 정치의 언어로 바뀐다는 점이다. “누가 잘못했는가”라는 질문이 “어떤 제도를 고칠 것인가”라는 질문을 압도한다. 사법은 곧 정권의 이해관계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개혁은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소비된다. 이 과정에서 제도 논의는 설 자리를 잃는다. 두 번째 이유는 사람 중심 개혁의 한계다. 사법개혁 논의는 종종 특정 판사, 특정 수장, 특정 재판을 겨냥한다. 물론 개인의 책임을 묻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개인을 겨냥한 개혁은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사람이 바뀌면 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