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사법개혁, 절차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유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사법개혁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국민이 법원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은 여전히 반복된다. 이는 단순히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다. 국민이 불신하는 것은 판결의 결론 그 자체보다 그 결론이 나오기까지의 절차가 공정했는가 하는 점이다. 절차가 투명하고 공정하다면 결과가 불리해도 수용된다. 반대로 절차가 불공정하다고 느껴지면 결과가 아무리 법리적으로 타당해도 신뢰는 무너진다. 따라서 진정한 사법개혁은 절차적 정의의 회복에서 출발해야 한다. ◆ 절차의 공정성, 사법 신뢰의 첫 번째 조건 재판은 국민이 국가권력과 만나는 마지막 접점이다. 이 만남이 공정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사법부는 존재 이유를 잃는다. 판결이 ‘법리적으로 맞는가’보다 ‘절차가 공정했는가’가 국민의 체감 정의를 결정한다. 이 때문에 선진국들은 사건 배당의 무작위화, 판결문 공개 확대, 재판 진행의 투명성 확보 등 절차 중심의 사법개혁을 중시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특정 사건의 배당이 적절했는가를 둘러싸고 의문이 제기된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의혹의 진위는 향후 조사와 절차에 따
조직구성원은 왜 ‘능력을 시가(時價)처럼 관리’ 해야 하는가 조직을 둘러싼 환경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기술의 생명주기는 짧아지고, 업무 방식은 디지털화를 넘어 인공지능과 자동화로 재편되며, 산업 전반의 생태계 자체가 3~5년 주기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더 이상 미래의 예측이 아니라 현재의 현실이다. 이 변화 속에서 조직과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핵심 능력이 있다. 바로 ‘능력의 시가관리’이다. 능력의 시가관리란, 개인의 능력을 과거의 공적이나 입사 당시의 자격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현재의 시장가치에 맞게 끊임없이 재평가하고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필자는 이미 1998년 이를 설명하며, “능력도 주식처럼 시가로 평가받는 시대가 온다”고 게재한 바 있다(필자 편저, 『최신 경영학용어사전』). 그 당시에는 다소 파격적인 발상이었지만, 지금은 글로벌 인재시장의 당연한 기준이 되었다. 예전의 조직문화에서는 근면·성실·충성도가 인사평가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한 번 입사하면 성실하게 근속한 것만으로도 안정적 경력을 기대할 수 있었고, 창업 혹은 특정 시기에 기여한 공적은 오랫동안 보호받는 자산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남의 성공을 축하할 수 있는 사회, 우리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가 “사돈 땅 사면 배 아프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 속담은 남의 성공을 시기하는 태도를 비꼬는 표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의 본래 의미는 정반대였다. 농경사회에서 ‘배가 아프다’는 말은 너무 기뻐서 거름(대변)이라도 보태 주겠다는 적극적 축하의 표현이었다. 이웃이 땅을 사면 마을 전체의 풍년이 기대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함께 도우며 기쁨을 나누었다. 남의 성공을 나의 실패로 여기지 않고, 공동체의 번영으로 받아들였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속담은 부정적 의미로 뒤바뀌었고, 우리는 남의 잘됨을 경계하고 비교하는 데 익숙해졌다. 시기심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남의 성공은 곧 ‘내가 밀린 것 아닌가’라는 불안과 연결된다. 타인의 성취가 내 위치를 흔드는 위협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본래 비교를 통해 생존을 확인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비교심과 시기심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다만 문제는 그 감정이 사회적 문화로 굳어질 때이다. 시기 문화가 확산될수록 협력은 약해지고, 공동체는 분열되며, 개인의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존재 이유에 대한 새로운 질문 - 나를 넘어 너에게 -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그러나 이 질문은 오랫동안 ‘나’ 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되풀이 되어왔다. 이제 질문을 조금 바꿔야 한다. “나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 바뀌는 순간, 삶의 방향도 달라진다. 들풀도 존재 이유가 있는데, 사람이 없을 수 있는가? 들길에 피어난 이름 없는 풀 한 포기에도 존재 이유가 있다. 그 풀은 바람을 식히고, 흙을 붙잡고, 작은 벌레의 그늘이 된다. 그 역할이 눈에 잘 띄지 않더라도, 그것이 있는 덕분에 세상은 완성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한가? 왜 많은 이들이 “나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존재 이유를 ‘나’ 안에서만 찾기 때문이다. 존재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나의 존재 이유는 “내가 무엇을 받는가”가 아니라 “누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서 완성된다. 지금 세상은 너무 쉽게 말한다. 이기심이 만든 세상이 지배한 듯 하다. “나부터 먼저 챙겨라.” “내가 행복해야 남도 도울 수 있다.”는 논리가 지배적인 흐름 같다.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판사의 품격과 시민의 법감정 법정은 논리의 공간이지만, 그 논리를 받아들이는 주체는 사람이다. 국민은 판결문보다 판사의 태도에서 정의를 느끼며, 문장보다 눈빛에서 신뢰를 얻는다. 법은 본질적으로 냉정하다. 감정보다 이성을 우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다루는 재판이 오로지 조문만으로 판단된다면 그 법은 ‘정의의 껍데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사법의 품격은 법의 냉정함과 인간의 따뜻함이 서로를 보완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 판사의 품격은 말 한마디, 태도 한순간에 드러난다 법복은 권위의 상징이지만, 그 권위는 품격에서 나온다. 품격은 화려한 언변이 아니라 경청과 절제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국민은 판결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판사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는 확신만으로도 법정을 신뢰하게 된다. 반대로 무심한 표정, 차가운 말투, 일방적 결론이 주는 냉소는 사법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판사의 언어와 자세는 곧 법의 얼굴이다. 국민은 그 얼굴을 통해 정의의 표정을 읽는다. ◆ 시민의 법감정은 정의의 나침반이다 사법부는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는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그 말은 ‘감정을 무시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우리 조직에 쥐나 사나운 개는 없는지? -안영과 경공이 남긴 고전의 통찰과 현대 조직의 성찰- ◆ 지신묘의 쥐 ― 보이지 않는 내부의 위협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에는 세 군주 '영공·장공·경공" 을 연이어 보좌하며 제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재상 안영(晏嬰)이 있었다. 그는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하였고, 군주의 그릇을 함께 키운 참된 재상이었다. 어느 날 경공이 물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안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지신묘(地神廟)의 쥐입니다.” 그는 설명했다. “지신묘는 토지신을 모시는 곳이라 연기를 피우자니 목재가 탈까 두렵고, 물을 붓자니 진흙 장식이 훼손될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쥐를 몰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임금 곁의 간신도 이와 같습니다. 안에서는 임금을 미혹하게 하고, 밖에서는 백성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군주의 신임을 등에 업고 있어 손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욱 위험한 쥐입니다.” 이 비유는 오늘날 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눈에 띄지 않는 내부의 이권, 사익을 좇는 구성원, 리더의 주변을 오염시키는 사람들은 조직을 조용히 갉아먹는다.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럽니스트 이상수 | 훈수와 실전게임 - 말의 홍수 시대, 책임 없는 훈수꾼들 - 요즘 방송을 보면, 공영방송이든 유튜브 TV든 정치와 사회 이슈를 다루는 패널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유로운 프리랜서 해설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이야기꾼에 불과하다. 그 중에 몇 분은 전문가적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분이 있긴 하다. 그분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패널들의 임무는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복잡한 현실을 흥미롭게 풀어내는 데 있다. 방송이 끝나면 그 말에 대해 책임을 묻는 피드백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흥미로운 말로 분위기를 이끌어 가면 그들의 미션은 완수된 셈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쓸모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 훈수와 실전의 간극 ― 청년 시절의 교훈 나는 1960년대 말,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시절의 부끄러운 경험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퇴근 후 선배들이 휴게실에서 바둑을 두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았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바둑을 곁에서 보며 자연스레 훈수를 흉내 내기도 했던 터라, 나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 상 수 | 사법부는 정의를, 언론은 진실을 밝힌다 ― 공론장에서 신뢰를 회복해야 할 두 주체 ― ◆ 정의와 진실, 서로를 비추는 거울 판사와 언론은 역할은 다르지만 공공의 이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사법부는 법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고, 언론은 보도를 통해 진실을 밝혀낸다. 이 두 제도는 민주주의의 두 축이다. 그러나 사법부는 언론이 재판을 ‘재단’한다고 느끼고, 언론은 법원이 ‘닫힌 세계’라고 비판한다. 이 긴장 속에서도 사법과 언론은 서로를 견제하며 동시에 국민의 신뢰를 유지하는 존재다. 언론이 사법권을 감시하지 않으면 권력은 경직되고, 사법부가 여론에 휘둘리면 정의는 감정의 포로가 된다. 균형과 절제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재판은 법정에서, 그러나 신뢰는 공론장에서 판결은 법정에서 내려지지만, 그 판결이 국민에게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공론장’에서 형성된다. 국민은 법조문 원문보다 뉴스와 보도를 통해 사법을 경험한다. 따라서 언론은 ‘누가 이겼는가’보다 ‘왜 이런 판단이 나왔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사법은 결과보다 이유가 중요하고, 언론은 그 이유를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해야 한다.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 상 수ㅣ 국민이 신뢰하는 재판의 조건 – 공정의 심리학 - 사람들은 법원의 판결이 옳은지보다 그 과정이 공정했는가를 더 중요하게 느낀다. 심리학에서도 결과의 유불리보다 절차적 공정성이 만족감을 결정한다고 본다. “법정에서 내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판결이 불리해도 수용한다. 국민이 법원을 신뢰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절차적 정의’에 있다. ◆ 사람들은 결과보다 대우에 반응한다 심리학자 톰 타일러(T. Tyler)는 공정성 인식의 네 요소를 제시한다. ① 발언권: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말할 수 있었는가, ② 존중: 재판부가 인간적 존중을 보여주었는가, ③ 중립성: 판사가 편향되지 않았는가, ④ 신뢰: 재판부가 선의를 갖고 판단한다고 느껴졌는가 등이다. 위 네 요소가 충족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공정하다”고 느낀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절차가 공정하면 법과 제도를 지지한다. 우리 법정이 이 기준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 판결문보다 판사의 태도가 신뢰를 만든다 재판의 공정성은 법조문이 아니라 판사의 언어와 태도에서 드러난다. 판결문이 아무리 논리적이어도 당사자가 법정에서 무시당했다고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 상 수ㅣ <돌담에서 배우는 삶의 철학 ③> 돌담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 ― 바람도 쉬어가는 자리 ― 어느 마을길을 걷다 보면, 오래된 돌담이 있다. 햇빛에 물든 이끼, 바람에 매만져진 표면, 그 앞에 서면 마음이 절로 느려진다. 돌담은 아무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돌을 쌓던 손의 체온, 지나간 세월의 바람, 그리고 그 곁을 오가던 사람들의 한숨과 웃음이 모두 그 안에 스며 있다. 돌담은 그 자체로 마을의 기억이며, 사람들의 삶을 품은 연대기다. ◆ 모난 돌이 제 자리를 찾을 때 좋은 돌담은 모난 돌이 꼭 필요하다. 둥근 돌만으로는 담이 세워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거친 돌기가, 다른 누군가의 움푹한 자리에 맞물리며 담은 단단해진다. 사람도 그렇다. 부드러운 이만으로는 세상을 지탱할 수 없다. 고집이 있고, 모가 있고, 때로는 맞서 싸우는 사람, 그들의 존재가 사회를 버티게 한다. 모난 돌을 버리지 않고 자리에 맞춰 쌓아 올린 돌담은 불완전함 속의 완성을 보여준다. 그 모양 그대로, 사람 사는 세상도 그렇다. ◆ 돌담에 기대어 쉬는 사람들 오랜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 상 수 l 낙향의 길, 조선 선비들의 기개(氣槪) 조선시대의 신하들에게 임금의 말은 곧 법이자 절대적 명령으로 통용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명령이 도리에 어긋나거나 옳지 않다고 여겨질 때, 일부 신하들은 목숨을 걸고 직언하거나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을 택하였다. 이를 '사직(辭職)·사퇴(辭退) 또는 사관(謝官)’이라 불렀으며, 그 근본 정신은 ‘사의정신(捨義精神)' 즉 '옳음을 지키기 위해 벼슬과 이익을 버리는 정신' 으로 일컬어졌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엄격한 신분 질서 속에서도 왕명을 거슬러 낙향을 선택한 이들이 있었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불의에 대한 거부이자 양심의 외침' 이었다. 여기서는 낙향을 하신 조선시대의 몇 분을 소개하면서 그 분들의 기개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 남명 조식 — 벼슬보다 도(道)를 중히 여긴 학자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명종·선조대의 대학자로, 남명학파의 영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조정의 벼슬 제안을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경남 합천에 머물며 학문과 제자 교육에 전념했다. 조정의 부당한 정치를 따르지 않고 '벼슬보다 도(道)' 를
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 상 수 ㅣ <돌담에서 배우는 삶의 철학 ②> 돌담의 사회학, 협치의 구조 ― 다름이 만드는 질서, 협력이 세우는 사회 ― 한 마을의 돌담을 보면 그 마을의 품격을 알 수 있다. 돌 하나하나가 제 자리를 찾고, 서로를 받쳐 주는 구조 속에서 비로소 마을의 질서와 미학이 드러난다. 사회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좋은 사회란 모든 구성원이 같은 생각을 하는 사회가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역할이 부딪히면서도 전체의 균형을 잃지 않는 사회다. 그 조화의 원리가 바로 ‘협치(協治)’의 근본정신이다. 정치·행정·교육·조직 어디에서나 돌담의 사회학은 협치의 구조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 리더십의 기초 : 아래에서 받쳐주는 돌 돌담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무게를 견디는 것은 언제나 아래쪽 돌이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이 기초를 받쳐 주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돌도 위태롭다. 사회에서도 리더십의 본질은 ‘지탱’이다. 지도자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깊은 자리에서 존재해야 한다. 정치적 권력이나 직책이 아니라, 공동체를 받쳐주는 ‘아래돌의 정신’이 필요하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이 아닌 타인을 세우고, 자신의 성취보다 전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