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현상과 민주주의 ⑥ > 민주주의의 적은 독재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가장 조용한 방식 - 민주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제도가 아니다. 총성이 울리거나 군홧발이 등장해서 끝나는 경우는 드물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대부분 아주 조용하게,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진행된다. 그 이름은 독재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독재는 적어도 경계의 대상이다. 위협이 분명하고, 저항의 이유도 명확하다. 그러나 무관심은 다르다. 그것은 위험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피곤해서”, “먹고 살기 바빠서”, “내가 관여해도 달라질 게 없어서”라는 말 속에 숨어 사회 전반에 퍼진다. 이렇게 무관심은 민주주의의 내부에서, 저항 없이 제도를 잠식한다. 민주주의는 참여를 연료로 삼는다. 투표, 토론, 감시, 질문, 비판 같은 일상적 행위들이 멈추는 순간, 제도는 껍데기만 남는다. 선거는 치러지지만 선택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의회는 존재하지만 시민의 삶과 멀어진다. 형식은 남아 있지만 내용은 비어간다. 무관심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책임의 공백을 만들기 때문이다. 시민이 관심을 거두면, 권력은
<기획취재>KBN 한국벤처연합뉴스 구일암 기자 | 지난 2026년 2월 27일 현대자동차그룹이 전북 새만금에 향후 5년간 약 10조 원을 투입해 AI, 수소, 로봇 중심의 미래 첨단산업 거점을 구축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관련 부품 및 소재 협력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다. 특히 수소 에너지의 효율적 저장과 이동형 전력원(Power Pack) 기술을 보유한 강소기업들이 현대차의 '수소 생태계' 파트너로 주목받고 있다. 현대차의 새만금 구상: ‘그린수소 생산부터 AI 시티까지’ 현대차그룹은 새만금 112만㎡ 부지에 200MW 규모의 대형 수전해 플랜트와 GW급 태양광 발전 설비를 구축할 계획이다. 여기서 생산된 청정 수소는 새만금 내 'AI 수소 시티'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며, 트램, 버스, 자율주행 물류 로봇 등의 동력원이 된다. 문제는 생산된 수소를 얼마나 안전하고 밀도 있게 저장하여 모빌리티에 탑재하느냐는 점이다. 지스타모빌리티의 핵심 병기, ‘금속수소화합물’ 이 대목에서 지스타모빌리티의 기술력이 현대차의 거대한 퍼즐을 완성할 핵심 조각으로 거론된다. 지스타모빌리티는 기존 고압 기체 수소 저장 방식의 위험성과 부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금속수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현상과 민주주의 ⑤> 질문을 멈춘 사회는 퇴보한다 - 교육·언론·제도의 경직화가 만드는 침묵의 구조 - 사회가 건강할 때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은 의외로 조용한 질문들이다. “왜 그런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이 결정의 책임은 누가 지는가.” 질문은 사회의 속도를 늦추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방향을 바로잡는 브레이크다. 이 브레이크가 사라질 때 사회는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위험해진다. 질문이 사라진 사회의 공기는 단순해진다. 복잡한 설명은 줄고, 단정적인 구호가 늘어난다. 비판적 사고는 불편함으로 취급되고, 질문은 분위기를 흐리는 행위로 여겨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묻지 않는 법을 배운다. 질문을 던지기보다 눈치를 보고, 이해하려 하기보다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는 신호가 사회 전반에 퍼진다. 이 현상은 교육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교육이 질문을 키우는 과정이 아니라 정답을 빠르게 찾는 훈련으로 바뀔 때, 학생들은 사고의 근육을 잃는다. 왜 그런지 묻기보다, 무엇이 나오는지를 외운다. 질문은 시험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현상과 민주주의 ④> 침묵하는 다수는 중립이 아니다 - 방관의 정치적 책임, ‘아무 말도 하지 않음’의 선택성 -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나는 어느 편도 아니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괜히 나섰다가 손해 보고 싶지 않다.” 이 말들은 얼핏 중립처럼 들린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침묵은 결코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언제나 이미 힘을 쥔 쪽을 돕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선택은,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의사 표시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참여를 전제로 작동한다. 참여란 반드시 거리로 나서는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질문하고, 판단하고, 의견을 드러내는 최소한의 행위가 민주주의의 산소다. 이 산소가 부족해질 때, 사회는 겉으로는 조용해지지만 내부에서는 서서히 숨이 막힌다. 침묵하는 다수가 생겨나는 이유는 이해할 만하다. 첫째, 비용의 문제다. 목소리를 내면 피곤해지고, 공격받을 수 있고, 관계가 불편해질 수 있다. 둘째, 무력감이다. “내가 말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은 많은 시민을 관객으로 만든다. 셋째, 책임 회피의 심리다. 침묵하면 판단의 부담을 지지 않아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김경호 변호사 | 단돈 2,300원. 한 청년의 삶에 ‘절도범’의 주홍글씨를 새기려 한 국가 권력의 맹목적 폭력성이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취소한 ‘2024헌마1051 기소유예처분’ 사건은, 독점적 기소권을 쥔 수사기관의 기계적 편의주의가 평범한 시민의 일상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서늘한 다면이다. 이 사건에서 검사와 헌재의 시선은 ‘자의적 억측’과 ‘객관적 실체’의 뼈아픈 대비를 이룬다. 검사 결정의 핵심은 매장 냉동고에 두고 온 800원짜리 아이스크림과 부주의로 결제가 누락된 1,500원짜리 과자를 묶어 무리하게 ‘절도’로 단정한 것이다. 피의자가 휴대전화를 수시로 보았으니 결제 누락을 알았을 것이라는 작위적 소설로 고의성을 덧씌웠다. 반면 헌재가 처분을 취소한 핵심은 ‘상식과 물증에 기반한 진실의 복원’이다. 헌재는 CCTV를 통해 아이스크림은 점유 이전조차 없었음을, 즉 절취 행위 자체가 없었음을 확인했다. 또한 본인 명의 카드로 다른 물품과 50원짜리 비닐봉지 값까지 결제하며 신원을 노출한 학생이 고작 1,500원을 훔칠 동기가 없다고 일축했다. 이는 단순한 수사 미진이 아니다. 유죄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현상과 민주주의 ③> 비판하는 시민이 민주주의를 구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판’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비판은 불만, 반대, 발목 잡기라는 말로 치환되고, 때로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행위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비판은 결코 파괴가 아니었다. 오히려 권력이 길을 잃지 않도록 붙드는 안전장치였고, 시민이 시민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책임이었다. 권력은 본성상 집중되려는 성향을 지닌다. 선의로 출발한 권력이라도 견제가 사라지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제도적 견제만이 아니다. 법과 규정은 최소한의 울타리일 뿐, 그 울타리가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힘은 시민의 감시와 질문이다. 비판 없는 권력은 자신을 시험받지 않기에 쉽게 오만해진다. 그럼에도 많은 시민이 비판을 주저한다. “지금은 비판할 때가 아니다”, “괜히 문제를 키우지 말자”, “전문가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말이 익숙하다. 이런 태도는 겉으로는 안정과 협력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판단을 유예하는 선택이다. 판단을 미루는 동안 결정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시민은 점점 관객의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김경호 변호사 | 검찰의 펜끝은 사람의 인생을 긋는다. 그 권력이 독단에 빠질 때 사법 정의는 흉기로 전락한다. 헌법재판소가 최근 취소한 ‘2021헌마725 기소유예처분’ 사건은 통제받지 않는 검찰 수사권이 어떻게 시민의 삶을 짓밟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표본이다. 검찰의 결정은 오만했다. 2016년 모 대학교 대학원 입학 전형에서 검사는 교수들이 특정 지원자를 합격시키기 위해 점수를 조작했다며 '업무방해' 혐의를 씌우고 '기소유예'를 처분했다. 죄는 인정되나 재판에는 넘기지 않겠다는, 수사기관 특유의 자의적 시혜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이 처분의 위법성을 철저히 짚어냈다. 이미 주동자로 지목된 공범들이 법원에서 최종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음에도 검사는 무리하게 피의사실을 유지했다. 대학원의 자율적 관행인 '우선선발권'을 자의적으로 범죄로 둔갑시켰고, 범의조차 없이 심사평가에 참여한 이들에게 범죄자 낙인을 찍었다. 헌재가 이를 "중대한 수사미진과 법리오해"로 규정한 것은, 검찰이 객관적 증거와 법리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서사만 고집했음을 명백히 입증한다. 이러한 위법적 결정이 반복되는 본질적인 이유는 권한에 따르는 책임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현상과 민주주의 ②> 왜 우리는 맹목적 추종에 빠지는가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라고 말하지만, 집단 속에 들어가면 생각보다 쉽게 방향 감각을 잃는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부터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저 사람이 앞서 가니까”라는 이유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결과가 바로 맹목적 추종이다. 맹목적 추종은 무지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하고 선의의 사람들, 책임감 있는 시민들조차 이 함정에 빠진다. 문제는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집단이 작동하는 방식에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소속을 원한다. 집단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안과 고립을 감수해야 하기에, 다수가 향하는 방향을 의심하기보다 따르는 편이 심리적으로 훨씬 편하다. 여기에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추종은 강화된다. 경제가 흔들리고, 사회가 불안하며, 미래가 보이지 않을수록 사람들은 강한 확신을 말하는 인물에게 끌린다.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언어로 설명해 주는 사람, “내 말만 따르면 된다”고 말하는 지도자는 위기의 시대에 매력적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확신이 검증된 해법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일 때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앤트밀 현상과 민주주의 ①> 국민들이 ‘앤트밀 현상’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자연에는 인간 사회를 비추는 거울 같은 장면들이 종종 있다. 그중 하나가 ‘앤트밀(Antmill),' 이른바 죽음의 소용돌이다. 시력이 거의 없는 군대개미들이 앞선 개미가 남긴 페로몬을 따라가다 방향 오류가 발생하면, 수백·수천 마리가 원을 그리며 끝없이 도는 현상이 벌어진다. 개미들은 자신들이 제자리에서 죽음을 향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탈진해 쓰러진다. 흥미로운 점은, 모든 개미가 죽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몇몇 개미는 이 이상한 순환에서 벗어나고, 방향을 바꾸며, 다른 개미들에게 탈출의 계기를 제공한다. 차이는 단 하나, ‘따라갈 것인가, 판단할 것인가’에 있다. 이 장면은 인간 사회에도 낯설지 않다. 길을 잘못 든 지도자 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집단은 집단적 오류에 빠진다. 더 큰 문제는, 그 오류가 단번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앞서 가는 사람이 있으니 맞겠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라는 심리가 작동하면서 집단은 더욱 단단히 원을 그린다. 마치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이상수 기자 | <사법신뢰회복 ⑨> 사법 신뢰 회복은 민주주의의 자기 수리 능력이다 - 제도 이후의 과제, 사회의 책임 -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의 강점은 스스로의 결함을 인식하고 고쳐 나갈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사법 신뢰의 흔들림을 둘러싼 오늘의 논의 역시 실패의 징후라기보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을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 신호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향으로 응답하느냐에 있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사법 신뢰 회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과 그 실행 단계를 살펴보았다. 인사권의 분산은 재판의 독립을 제도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출발점이었고, 판결의 설명 책임은 사법이 시민과 소통하는 최소한의 언어였다. 양심적 판사를 보호하는 제도는 사법의 품격을 유지하는 마지막 안전망이었다. 이어서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과 사법개혁이 정치화되며 좌초되어 온 이유, 그리고 입법부가 지켜야 할 헌법적 균형까지 짚어보았다. 이 모든 논의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진다. 제도가 마련된 이후,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법 신뢰 회복은 법률 몇 조를 고친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제도는 출발점일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사법신뢰회복 시리즈 ⑧> 판사의 ‘양심’, 국민은 어디까지 기대해야 하는가 — 양심이 믿음의 대상이 아닌, 검증의 대상이어야 할 이유 - 일상에서 우리는 종종 “양심에 기대어 말해 달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대체로 거짓 없이 사실을 말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최소한의 진실성을 지켜 달라는 사회적 약속이 그 말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사법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양심’이라는 단어는, 그 일상적 의미와는 다른 오해를 낳아 왔다. 판사들은 판결문에서 흔히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사법 독립의 상징처럼 반복되어 왔지만, 동시에 시민에게는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과연 국민은 ‘판사의 양심’을 어디까지 기대해야 하는가. 판사의 마음속 선의까지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보다 다른 기준이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민은 판사의 ‘내면적 도덕성’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위험한 기대다. 개인의 선함에 의존하는 사법은 운에 맡기는 사법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재판을 맡으면 정의가 실현되고, 그렇지 않으면 왜곡될 수 있는 구조라면, 그 사회의
<칼럼>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 <사법신뢰회복 ⑦> 입법부는 사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 견제와 존중 사이의 헌법적 균형 - 사법개혁 논의가 입법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가장 첨예한 질문이 등장한다. 국회는 사법에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으며,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분명히 하지 못했기에 사법개혁은 번번이 정치적 충돌로 소모되었고, 제도 개선은 진전되지 못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결단이 아니라 헌법적 균형에 대한 성찰이다. 입법부와 사법부의 관계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다. 헌법이 설계한 권력 분립은 상호 견제를 통해 권력의 자의를 막는 구조다. 이때 입법부의 역할은 사법을 통제하는 데 있지 않고, 사법이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데 있다. 이 원칙이 흔들릴 때, 사법개혁은 곧바로 정치 개입 논란에 휩싸인다. 입법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입법부는 사법의 구조와 절차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하고 입법할 수 있다. 판사 인사 구조의 분산, 인사 과정의 투명성, 판결 이유 기재의 기준과 범위, 양심적 판사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 등은